레드벨벳 - Perfect Velvet



레드벨벳은 아이돌을 잘 듣지 않는 나에게는 음악의 다양성을 넓혀 주는 존재다. 이들의 노래를 듣다 보면 음악에서 자본이란 무슨 의미인지, "뮤지션" 이라는건 어떤 존재인지 등등 괜히 생각을 하게 된다. 또 음악을 음악만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의심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이런 답이 내려지지 않는 고민을 하기에 앞서서 레드벨벳의 새 노래들은 좋다.



'피카부'는 간주 멜로디와 후렴구만으로 귀를 사로잡는 후크송이다. 전주를 빼도 5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으니 꽤나 복잡한 셈인데, 그럼에도 한번에 노래의 테마가 귀에 들어오는 걸 보면 후크의 매력과 곡의 전체적인 짜임이 대단하다. 특히 내게 곡을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는 우선 전주와 프리코러스 '랄랄랄랄라' 하는 멜로디에서 들어가는 엇박을 들 수 있겠다. 전주의 엇박 멜로디는 프리코러스에서도 깔려서, 다른 아이돌곡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소리가 꽉 차지 않는 편인 이 곡의 복잡도를 증가시킨다. 그렇지만 듣기에 전혀 어렵진 않다. 또 하나는 후렴구의 미니멀함이다. '피카피카부' '피카피카부' '흥이난여우' '그게나라구' 이렇게 5음절의 네 구로 구성된 (약간 오글거리지만 라임까지 맞추고 있다) 후렴은 단 한 개의 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다가 (끝부분 음을 올리는걸 쳐줘도 두 개다) 마디의 절반은 가사 없이 지나간다. 보컬이 이렇게 미니멀한 후렴이라니. 그렇지만 같이 깔리는 멜로디와 베이스 역할까지 대신하는 타악기가 더해져서 '흥이 난다'. 그래도 뭔가 허전하던 부분은 이후에 신디 멜로디를 그대로 따라가는 노랫말이 채워지면서 해소된다. 3분의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벌어지는 이 노래는 '지루해질 틈조차 없도록' 긴장의 강도를 조절하면서 서스펜스를 유지한다. '저 달이 정글짐에 걸릴 시간이지만 더 놀자'더니 그대로 끝나 버리는 이 곡. 무언가에 홀렸다 나온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의도를 알 수 없고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여우라는 컨셉을 노래의 구성에도 그대로 담은 것만 같다.


피카츄로 바꿔버린 고퀄의 비디오게임 OST 버전도 등장

두번째 곡 '봐'는 사실 앨범이 공개되기 전에 피카부보다 더 기대했던 곡이다. 80년대 디스코라는 게 뭔지 잘 모르는 채로 들어도 이건 완벽한 80년대 디스코의 재림이었다. 특유의 옥타브를 넘나드는 사운드와 90년대 즐겨하던 게임에서도 많이 들었던 듯한 신디 사운드는 싫어할 수가 없다. 애시드재즈를 드는 것 같은 몽환적인 코드진행에, 슈팅스타라도 터지는 듯한 후렴구. 기대했던 것만큼이나 신선한 소리를 복고적인 사운드를 섞어 들려주는 곡이다. 개인적으로 보컬 역시 피카부에서보다 훨씬 잘 녹아든다고 생각하는데, 피카부의 보컬은 박자나 강약 면에서 아주 미묘한 그루브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영상미 넘치는 이 티저를 봐야만 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I Just'. 히치하이커 작곡이라는 사실만으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강렬한 비트에 캐치한 멜로디, 평범함을 거부하는 딕션의 verse, 강렬함 속에 쌓아올린 화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라는 가사 때문이겠지만 후렴에서는 아주 살짝 롤러코스터의 향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피카부가 쫄깃쫄깃한 서스펜스로 채워졌다면, 이 노래는 시원시원한 비트 속에 온갖 아기자기한 요소들을 채워 넣었다.

히치하이커&태용&슬기 - I Just + Around (Live)
(저작권이 문제되지 않을 만한 영상이 없으니 히치하이커까지 등장한 라이브로 대신)

아이돌이란 작곡가부터 작사가, 연주자, 프로듀서, 엔지니어 등 음악의 완성에 필요한 관계자 뿐 아니라 안무가, 비주얼디렉터, 스타일리스트, 아트디렉터, 크리에이티브디렉터, 뮤직비디오제작팀... 등등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관련 직업군이 투입되어 만들어지는 기획 작품일 것이다. 물론 다른 큰 뮤지션들도 어느 정도 그런 직업군들이 따라가는 건 마찬가지겠으나, 아이돌은 음악, 안무, 뮤직비디오 등 모든 구성 요소들을 정해진 컨셉과 세계관 하에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이왕 철저한 분업과 많은 자본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일차원적이고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것보다는 무언가 궁금해지고 빠져들게 하는 컨셉이라면 좋겠다. 그런 컨셉에 맞춘 음악 역시 더 재미있어진다는 걸 레드벨벳이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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