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이발관 - 순간을 믿어요


언니네이발관의 네 번째 앨범 <순간을 믿어요>는 평이 엇갈리는 앨범인 듯하다. 1집-3집을 제대로 들어보지 않았기에 비교해서 얘기하긴 어려우나, 적어도 내게는 이 앨범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5집보다 더 찾게 되는 음악이기도 하다. 

이 앨범의 곡들은 굉장히 팝적인 구성인데, 미드템포의 노래들을 듣다 보면 상반되고 모순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분명 신나는 비트인데 끝없이 우울해진다. 마이너 코드를 아낌없이 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날것 그대로인 듯한 기타 소리와 물려서, 분명 몸은 신나고 댄서블한데 마음만은 우울, 분노, 외로움, 그리움 이런 네거티브한 감정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환희와 분노의 교차. 신나면서 슬픈 마음의 공존. 심연으로 향하는 길을 드라이브하다 어느 새 출구의 작은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터널을 달리는 듯하다 (그건 아마 <태양없이> 곡 가사 때문일수도..).


확언하긴 어렵지만 이 앨범은 앞의 세 앨범과 뒤의 두 앨범 사이에서 많이 다른 사운드를 들려주는 것 같다. 특히 기타가 아주 강렬한 인상을 준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능룡의 기타가 날아다니는 앨범이다. 물론 5집이나 6집에서도 그의 지분이 상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앨범에서 기타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여러 감정과 사운드를 담아내고 있다. 공간감이 있으면서도 fuzzy하고, 백업에 충실하는 듯하지만 사운드의 전면을 차지하면서 시종일관 존재감을 드러낸다.



언니네이발관 - 바람이 부는대로

첫 곡 <바람이 부는대로>의 인트로부터 기타는 그 존재감을 예고하고 있다. 굉장히 fuzzy한 사운드로 노이즈에 가까운 인트로를 들려준 뒤 잠깐의 멜로디에 이어 메인 리프로 넘어가는데, 내가 특별히 꽃혔던 포인트는 3박째의 엇박에서 나타나는 미묘하고 독특한 그루브다. 나 혼자만의 느낌일 수 있지만 이 엇박에서 기타가 아주아주 살짝 앞으로 미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보통의 훵키한 노래에서 들리는 그루브와 다른 느낌이어서 들을 때마다 신선하다. 이런 앞으로 미는듯한 느낌을 <순간을 믿어요> 의 메인 기타 리프에서도 받을 수 있다. 어쨌든 A와 G를 오가는 기타 리프 + 베이스가 좋은 마이너한 느낌의 멜로디 파트로 구성된 이 노래는 좋은 앨범 오프너다. 교차하는 여러 감정들과 드라이빙하는 기분을 한 곡에 함축하고 있달까.



언니네이발관 - 태양없이

다음 곡 <태양없이>부터는 본격적인 심연의 드라이브다. 대부분의 코드가 마이너 또는 마이너세븐 코드인 이 노래는 pre-chorus에서 한 키씩 떨어지는 코드진행 같은 포인트들이 있지만, 역시 메인 기타 리프랑 중간에 하프타임 비트와 함께 나오는 기타 솔로가 이 곡의 감정을 만들어주는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언니네이발관 - 꿈의 팝송

한 곡을 쉬고 나오는 <꿈의 팝송>과 <순간을 믿어요>에서도 이런 기조가 이어진다. 맛깔나는 기타 리프와 몽환적인 멜로디. <꿈의 팝송>에서는 후렴에서 등장하는 키보드 멜로디도 은근히 중독성있다. 3집 <울면서 달리기> 정도는 아니어도. 


언니네이발관 - 사라지지 않는 슬픔과 함께 난 조금씩

이어지는 <사라지는 슬픔과 함께 난 조금씩>은 비교적 묵직하고 느린 비트의 곡인데, verse에서는 키를 찾기 어렵다가 후렴에서 G키로 뭔가 안정화되는 느낌이 드는 묘한 노래다. 물론 이 느낌도 기타의 공간감있는 소리가 한 몫을 한다.


언니네이발관 - 깊은 한숨

스탠다드 펑크 모던락 같은 <#1>이 지나고 등장하는 <깊은 한숨>에서도 마이너의 향연과 기타의 존재감이 이어진다. 엇박의 경쾌한 진행으로 노래의 맛을 살리면서 우울한 느낌은 배가시키는 기타 멜로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두 곡이 이어진 후 앨범을 마무리짓는 <천국의 나날들> 역시 이런 분위기를 잇는다. 2집 베이시스트였던 고 이상문을 추모하는 곡이라는 사실을 알고 들으면 더 아프다. 후렴에서는 끓어오르는 듯한, 왠지 초기 콜드플레이가 생각나는 기타가 감정을 고조시킨다. 약간 오글거리지만 이해할 수 있는 나레이션이 끝난 뒤 이어지는 짧은 기타 멜로디에서 감정의 절제된 절규를 느낄 수 있다.

잊을만 하면 생각나서 듣게 되는 앨범. 자켓의 어두운 보랏빛의 사운드를 들려주는 앨범은 어쩌면 요즘 듣는 음악 가운데서는 제일 날것의 느낌에 가까운 듯하다. 하나씩 듣다 보면, 아플까봐 건드리지 않는 원초적인 감정 속으로 빠져들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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