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하 30주년 앨범 - 우리 이대로 영원히



유재하 - 사랑하기 때문에
(초판 발매 LP판의 이 자켓이 더 예쁜 것 같다)

고 유재하의 음악을 처음 들은 게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뒤로 <사랑하기 때문에>는 항상 나의 최소 top 5 앨범이었다. 앨범 전체적으로 그리고 각각의 곡이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새로운 음악인 데다가,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클래식과 재즈에서 영향받은 진행이 많이 녹아들어 있다. 흔히들 유재하의 음악을 발라드로 분류하면서 한국 발라드의 시초라는 식으로 많이 이야기 하는데, 유재하의 음악에는 확실히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어쨌든 꼭 유재하라는 이름 석자가 주는 무게감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의 노래를 다시 부른다는 게 결코 가벼운 작업은 아닐 것이다. 이번 30주년 헌정 리메이크 앨범 (개인적으로 앨범 제목은 별로다)은 유재하 음악의 재해석을 넘어서 각 뮤지션의 색깔로, 그리고 2010년대의 소리로 원재료를 가공한 것에 가까운 듯하다. 곡마다 서로 다른 뮤지션들이 리메이크했기 때문에 사뭇 색깔이 다른데, 기대 이상으로 좋은 노래들이 몇 있었다.



이진아 - 그대 내 품에 (유재하 커버)

이진아가 부른 <그대 내 품에>와 지소울의 <텅빈 오늘 밤>은 이 앨범에서 가장 좋게 들은 곡들이다. 그냥 자신들의 노래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원곡의 멜로디 화성 가사에서 느껴지는 감성이 묻어난다. 원곡의 위대함과 뮤지션들의 실력과 매력을 알 수 있는 부분.

이진아는 다른 뮤지션의 곡들을 자신의 것마냥 소화해서 부르는 데 항상 탁월했다. 이번 곡 <그대 내 품에> 역시 믿고 듣는다. 원곡의 분위기는 유지하되 좀더 포근한 피아노 반주 위에 가까이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얹어서 달달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을 살렸다. Verse에서는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사랑하는 사람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가사를 살리고, Pre-chorus에서는 박을 쪼개며 나오는 피아노 반주가 사랑이 떠나는 상황의 애틋함과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후렴에서는 목소리가 살짝 멀어지고 반주가 풀어지면서, 모든 걱정을 잊고 사랑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분위기를 낸다. 여기서는 코드를 메이저하게 변경한 것과 메인보컬을 중앙과 좌우에서 한 소절씩 번갈아 나오도록 나눈 점, 몽환적인 화음을 얹은 점 등도 주요하게 작용한 것 같다.

너무나 취향저격이라 거짓말 보태자면 원곡을 잊을 정도인데, 좋은 노래들이 그렇듯 순간순간의 소리에도 신경을 쓴 듯하다. 예를 들면 2절의 "내 취한 두 눈에"의 화음이 그렇고, verse에서 네 번 나오는 "그대의"를 첫 두 번은 계이름 "도 시~라 솔"로 처리하고 뒤의 두 번은 "도 시플렛-라 솔"로 부른 게 그렇다. 다른 곡들에서도 이진아는 이런 작은 트윅들을 적재적소에 많이 쓰는데, 여기서도 그의 센스가 드러난 게 아닌가 싶다.



지소울 - 텅빈 오늘 밤 (유재하 커버)

지소울의 <텅빈 오늘 밤>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좋은 리메이크를 들려준다. 원곡이 80년대의 디스코에 가까웠다면 이 곡은 훵키함이라는 테마만 가져간 채 완전히 새로운 그루브를 들려준다. 완전히 늘어진, 원곡의 2박 4박 대신 3박에 강조가 들어가는 셔플스러운 느낌의 비트다. 키보드나 베이스 등의 악기들 연주는 물론이고, "그게 우리의 끝이었나" 뒤에 나오는 기타 리프도 새롭다. 이진아처럼 이 곡도 후렴의 코드진행을 메이저하게 변경했는데, 이 역시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물론 원곡의 쌉쌀한 맛을 좋아하지만, 이 곡에서는 코드를 바꾼 덕에 완벽히 도시남자의 노래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 밖에 메이트리로 아카펠라로 재탄생한 <Minuet>나 팝적이고 훵키한 맛을 살린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등의 노래도 흥미로웠다. 전체적으로 유재하라는 대가의 음악을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키려 한 시도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어찌 됐든 30년이 된 노래들을 리메이크하면서 80년대의 소리를 그대로 쓸 필요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각 뮤지션의 느낌을 잘 살린 곡들도 많고, 트렌디한 소리를 섞어 감성을 살려 보려는 노력을 많이 한 것 같다. 


그렇지만 역시 리메이크를 들으며 원작자의 진가를 한번 더 알아보게 되었다는 언급은 빼놓을 수 없겠다. <우리들의 사랑>이나 <지난 날> 같은 곡에서 많이 아쉬웠던 건 원곡의 맛을 살리는 신선한 코드진행이 평범한 것들로 대체된 부분이다. <우리들의 사랑>의 후렴은 밋밋해져 버렸다. <지난 날>의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에서는 후렴 직전에 자연스럽게 키를 올리는 B플랫-A 코드진행이 사라지면서 타이트하다 풀어지는 맛이 있었던 노래의 재미가 사라졌다. 두 곡 모두 랩은 굳이 왜 들어가야 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가창력 부족으로 방송불가 판정을 받곤 했다던 유재하의 보컬 역시, 노래 실력과는 별개로 슬픈 노랫말을 덤덤하게 부르는 맛이 있다는 걸 다시 인정하게 되었다. <지난 날>의 원곡은 경쾌한 반주와 슬픈 가사가 담백한 목소리와 어울려 아이러니한 감정을 살리는 노래였던 것 같고, 그래서 리메이크가 더 어렵지 않았나 싶다. <우울한 편지>에서는 사운드의 세련됨에도 불구하고 원곡에는 없던 종류의 묘한 촌스러움을 느꼈는데, 아마 더 감정을 파고드는 박재정의 보컬이 verse의 코드진행과 맞물린 탓인 듯하다.




불과 몇 달만에 방문한 서울은 그대로인 듯 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주었다. 새로운 것과 익숙했던 것이 동시에 주는, 궁금함과 거부감과 편안함이 합쳐진 묘한 기분이 마치 이 앨범을 들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라고 하면 꿈보다 해몽이겠다. 어쨌든 새로운 자극이 주는 신선함, 익숙한 것에서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다시 꺼내보게 하는 즐거움. 이런 것들은 언제든 다시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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