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 거꾸로 보는 고대사

어릴 적 나는 역사 덕후였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삼국시대는 온갖 디테일한 인물과 사건을 외우고 다녔더랬다. 어렸으므로 당시의 역사관을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이기도 했고, 천성이 흔히들 말하는 '착한 사람'이나 '약자'가 이기는 스토리를 좋아했으므로 삼국 중 가장 약했던 신라와 역시나 삼국 중 가장 착하고 약한(?) 유비의 촉한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자라는 동안 역사를 바라보는 주류 역사관(학계의 주류는 내가 잘 모르지만 적어도 대중에게 알려진 바)이 많이 바뀌었는데, 특히나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 차례 뒤집히기도 하고 다양해지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드넓은 만주땅을 그리워하며 고구려를 찬양하고 신라를 민족의 반역자로 까는 관점이나 신라의 통일의 의의와 한계를 구분하는 관점이나, 근대의 민족주의적 시각을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멀리한다. 그래서 그렇게 민족주의를 배제한 대안의 역사관으로 과거를 바라본다는 게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또, 정말 순수하게 과거 사람들의 생각, 특히나 몇몇 귀족층이 나라를 대하는 시각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하기도 하다. 물론 완전히 객관적인 역사 서술이란 불가능하기에, 이 책은 오늘날에 중요한 가치인 문화적 다양성의 관점에서 고대사를 바라본다고 못박고 있다. 전문적인 서적은 아니지만 신선하고 설득력있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고, 새로운 계열의 식민사관으로 오해받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민족적 순수함'에 상처(?)를 줄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애초에 민족적 단일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물학적으로만 봐도 전혀 실체가 없지 않나. 그리고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 이후 나타난 것이므로 전근대 사람들의 생각에 끼워넣을 수 없으며, 역사를 이제는 문화적, 종족적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작가의 이야기가 충분히 설득력있다. 그래서 민족적 자존심이 끌어내려진다는 느낌보다는, 작가의 의도대로 '군사적, 지배적' 자존심이 '문화적, 포용적' 자존감으로 일정부분 바뀌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오늘날 지배계급의 팽창적 야망이 아닌 다수 한반도인들의 진정한 이해관계에 맞는 고대사를 지향한다. 민족적 고대사를 쓰든 탈민족적 고대사를 쓰든 궁극적으로 역사쓰기는 늘 취사선택의 과정이고, 늘 서술 주체의 시각이 개입하게 돼 있다. 이 책의 시각은 21세기 한반도가 직면하고 있는 각종 도전들에 대한 필자의 고민에서 비롯됐다. 지금 우리의 과제는, 지역 내의 이웃나라들과 보다 잘 어울리고, 다양한 소수자들에 대한 관용을 가지고,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성숙한 동북아시아의 사회민주적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무엇보다 고대 한반도의 세계성과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다. 

외부 세력의 정복이란 늘 인명 피해를 수반하는 비극적 과정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문화 교류와 인구의 혼합화가 이루어져 더 복합적인 문화로의 길이 열린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침략을 긍정할 필요는 없지만 전근대에 '우리' 영토 안에서 많은 '외부인'들이 살았다는 것을 전면 부정하거나 '수탈적 식민지'라고 규탄할 필요도 없다. 결국 온갖 사람들이 장기간 섞여야 위대한 문화가 태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낙랑의 남은 인구가 고구려에 흡수돼 고구려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4세기 후반 고구려에 노획된 중국인의 후손은, 7세기 초반 수나라와 항쟁이 벌어졌을 때 고구려 편에 서서 참전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고정된 국경이 없는 데다 인구의 유입과 유출이 비교적 자유로워 인구 구성이 늘 새로워지는 고대국가 사이의 전투들을 오늘날의 '민족 투쟁'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과연 과학적인 사학일 수 있을까? 그 당시 항쟁의 주체들은 민족이 아닌 국가였으며, 고구려 국가의 다양한 종족 구성에 다수의 중국인들도 자연스럽게 포함돼 있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역사 쓰기란 현재적 선택의 문제다. 타자에 대한 적대성을 부각하며 국가주의적 내부 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 속의 전란들을 '타민족과의 영웅적 항쟁'으로 쓸 수 있는가 하면, 타자들과의 섞임, 어울림, 교류를 중심에 놓는 역사를 저술함으로써 국경을 넘는 지역공동체 만들기를 지향할 수도 있다. 과연 우리는 고구려-중국 관계를 정리할 때 어떤 길을 택할 것이며, 동북아시아 지역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과연 고대사회에도 오늘날과 같은 '우리'의 정체성이 존재했을까? 물론 처음부터 '민족(nation)'이라는 근대적 개념을 쓰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민족'이란 정치의식이나 문화, 언어 형태상 동질화된 집단을 의미하는데, 조선시대의 양반과 노비 사이에, 아니면 함경도와 제주도 주민 사이에 과연 어느 정도의 사회, 문화, 언어적 동질성이 있었겠는가? 언어적 동질성을 이야기하자면, 엘리트들의 민족의식이 형성된 개화기 이후에도 무수한 방언들을 썼던 조선인들은 우리 생각만큼 쉽게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다. ... 
그런데 전근대에 '민족'은 없었다 해도 '종족(ethnic group)'은 얼마든지 형성될 수 있었다. '민족'이란 높은 수준의 근대적 동질성을 전제로 하지만, '종족'은 (막스 베버가 강조한 대로) 공동 기원에 대한 집단적 인식이나 공동의 종교, 가치 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외부적 타자에 의해 '단일 종족'으로 규정되는 것, 즉 집단적 타자화의 경험이 종족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

과연 이처럼 철저한 구별법이 적용되는 신라에서 피정복민까지도 아우르는 공고한 공통의 종족적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었을까? 신라가 약해졌을 때 궁예와 견훤 등 반신라 반란군 지도자들이 옛 고구려민과 백제민들의 본래 정체성에 효율적으로 호소할 수 있었다는 것은 통일신라의 사회, 문화적 통합력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물론 국가가 이뤄낼 수 없는 공통 정체성의 형성을, 유교적 교육과 불교가 상당 부분 이뤄냈다. ... 
지금의 우리에게야 '우리가 하나'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종족적으로 '하나'가 되는 과정은 길고 복잡했다. 두 차례의 '통일', 즉 신라 통일과 고려의 통일이 있은 뒤에도 1202~1204년 경주에서 신라를 부흥시키자는 반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1236-1237년에는 담양 지역에서 백제를 부흥시키겠다는 반란도 일어났다. 그만큼 '한반도 공통의 정체성'보다는 각 지역의 옛 국가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방적 정체성이 더 먼저였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한반도 주민들의 종족적 정체성을 통일시킨 것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성리학 보급으로 인한 지방 엘리트들의 교육, 가치관, 생활양식의 동질화와 임진왜란과 같은 '우리 모두'에게 가해진 처참한 공동의 역사적 시련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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