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 나는 왜 쓰는가 (2)


사람들이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중대한 결심을 하는 계기는 사실 단순하거나 평범한 경우가 많다. 작가는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포장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를 읽으면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는데, 글을 쓰는 이유로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똑똑해 보이고 유명해지고 싶은 이기심과 소리와 낱말을 배열하는 데서 오는 순수한 미학적인 목적이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지난 번 읽었을 때 분명히 똑같은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하므로 어느 정도 이런 솔직한 내용을 기대했을 법 한데, 그럼에도 잊어버렸던 내용을 읽으면서 이번에 다시 놀랐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정치성향을 모른 채 화려한 글을 썼을 지 모른다는 그의 고백은 사회적 맥락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는 것 같아 서글프다. 
'코끼리를 쓰다' 도 흥미로웠는데, 그가 제국주의의 본질을 깨닫게 된 계기가 너무나 사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국주의 지배자의 일원으로서 한편으로 그 피해자이기도 한 모습이 마치, 오늘날의 이슈에 빗대자면 많은 남자들도 사실은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알았던 것이라곤 섬기던 제국에 대한 나의 증오와, 도무지 일을 할 수 없게 만들려던 악독하고 자그만 인간들에 대한 나의 분노 사이에 내가 끼어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마음 한편으로 나는 영국의 지배를, 납작 엎드린 민족들의 의지를 영영 억누르는 거역 불가능한 압제라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총검으로 승려들의 배때기를 푹 쑤시는 것보다 이 세상에 더 기쁠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식의 감정은 제국주의의 정상적인 부산물이다."

"그 때 나는 내가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앗다. 사람들이 내가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 그리고 손에 소총을 들고 서 있는 그 순간 나는 백인의 동양 지배가 공허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군중 앞에 총을 들고 서 있는 백인인 나는 겉보기엔 작품의 주연이었지만, 실은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바보같은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백인이 폭군이 되면 폭력을 휘두르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지만, 백인 나리라는 상투적 이미지에 들어맞는 가식적인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 나의 모든 생활은, 동양에 있는 모든 백인의 삶은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한 기나긴 투쟁이었다."

많은 좋은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조지 오웰은 인간의 심리나 사회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어른의 언어로 쓰였는데도 작가의 어린 시절 생각이나 마음이 어떠했을지 공감이 되면서, 어른들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거의 눈치채지 못했던 건 헤일이 공식적으론 나와 싸우려고 덤볐으나 실제로 공격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 한 방을 맞은 뒤 녀석은 나를 다시는 괴롭히지 않았다. 내가 이 사실의 의미심장함을 이해하기까지는 20년은 걸렸을 것이다. 당신의 나는 강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약자가 처하게 되는 도덕적 딜레마를 뛰어 넘는 시야를 갖추지 못했다. 그때 내가 못 본 건 '규칙을 깨라, 아니면 죽는다' 라는 교훈이었다. 나는 그런 경우에 약자가 자신을 위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 권리를 갖게 된다는 점을 몰랐다. ... 나의 반항은 감성적인 것이었을 뿐, 지적인 반항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나의 맹목적인 이기심과 무능력(나 자신을 경멸하지 못하는 능력이 아니라 '싫어하지' 못하는 능력), 그리고 생존 본능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이는 나이 먹는 일을 거의 가당찮은 재앙처럼 여긴다. 무슨 신비로운 이유 때문에 자기한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로 보는 것이다. 때문에 아이가 보기에, 서른이 넘은 사람은 누구나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살아가는 이유도 없이 그냥 살아 있는, 즐거움이라곤 없는 괴상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70년에서 100년 가까이 지나간 시대의 글인데도 지금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걸 발견하면 묘한 기분이 든다. 

"아마도 기계로 책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독창성을 뛰어넘는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영화와 라디오에서, 광고와 선전에서, 그리고 하류 저널리즘에서, 일종의 기계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이미 목격할 수 있다. 예컨대 디즈니의 영화는 본질적으로 공장식 생산과정을 통해 제작되고 있다. ... 글쓰기 과정에서 상상력은(어쩌면 의식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책은 관료들에 의해 다종다양하게 계획될 것이며, 워낙 많은 손을 거침에 따라 완성될 때면 조립라인 끝에 나오는 포드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개인의 작품이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건 무엇이든 쓰레기일 터임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언어의 사용에 대해 논하는 '정치와 영어' 에세이를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오웰은 당시의 영어 글쓰기가 나쁜 습관들로 물들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를 '언어의 쇠락'으로 표현했다. 그 이면에 정치 경제적인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된 생각일 수 있겠다. 오늘날 언어의 변화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한번쯤 되새길 만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영어에 관한 글이므로 원문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제시하는 글쓰기의 원칙은 간단하면서도 기억해둘 만하다.

1. 익히 봐왔던 비유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2. 짧은 단어를 쓸 수 있을 때는 절대 긴 단어를 쓰지 않는다.
3. 빼도 지장이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뺀다.
4. 능동태를 쓸 수 있는데도 수동태를 쓰는 경우는 절대 없도록 한다.
5. 외래어나 과학 용어나 전문용어는 그에 대응하는 일상어가 있다면 절대 쓰지 않는다.
6. 너무 황당한 표현을 하게 되느니 이상의 원칙을 깬다.

나의 지금 글만 봐도 이미 1번 원칙을 무시하고 상투적인 비유들을 곳곳에 사용한 것 같다. 어쨌든 당시의 글쓰기를 비판하며 조지 오웰이 예시로 든 내용을 읽자니 정말 '한대 얻어맞는 느낌이라' 여기 남길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속임수와 남용에 대해 나열해봤으니, 이제는 그런 경향이 어떤 식의 글을 낳는지 다른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이번엔 성격상 상상을 가미할 필요가 있겠다. 말하자면 훌륭한 영어 구절을 최악의 현대식 영어로 바꿔볼까 한다. 다음은 구약성경 전도서(9:11)에 나오는 유명한 운문이다.

I returned, and saw under the sun, that the race is not to the swift, nor the battle to the strong, neither yet bread to the wise, nor yet riches to men of understanding, nor yet favour to men of skill; but time and chance happeneth to them all.

다음은 현대식 영어로 고쳐본 것이다.

Objective consideration of contemporary phenomena compels the conclusion that success or failure in competitive activities exhibits no tendency to be commensurate with innate capacity, but that a considerable element of the unpredictable must invariably be taken into account."

그의 위트에 '무릎을 탁 치게 되면서도', 그가 헐뜯는 무미건조하고 현학적인 현대식 언어가 내겐 더 이해하기 쉬웠다는 사실이 서글플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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