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희/신동일 - 푸른 자전거

어떤 기억이나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음악들이 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이 <푸른 자전거>앨범을 어떻게 알고 사셨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저기를 오가는 차안에서 많이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린 마음에 피아노 선율이 너무 좋아서 악보도 사고 심지어 작곡가인 신동일님의 공연에 가서 악보집에 싸인까지 받았다. 많이 듣고 피아노로 제법 연습도 해서인지 지금도 전 앨범의 거의 모든 노트를 기억하고 있다.

<푸른 자전거>를 들을 때 내가 느끼는 특별함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는 감상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물론 그 영향이 생각보다 클 수는 있겠다. 역시 어릴 때 들었던 조지 윈스턴의 디셈버 앨범이나 야니는 지금도 다른 비슷한 류의 피아노 곡들보다 훨씬 좋게 들리니까. 그렇지만 밝다가도 어딘가 아련한 멜로디, 아는 지인이 '4차원 같다'고 표현한 예측하기 어려운 전개, 참신한 코드진행 등 음악적으로 내게 와닿는 점들이 분명 많다. 그렇기에 지금 찾아 들어도 추억의 도움 없이 맑은 40분을 보낼 수 있다. 듣고 나면 마음이 한 층 차분해지면서 좋은 에너지가 조용하게 자리잡는다. 

오늘날의 피아노 독주곡들을 '뉴에이지'라는 정체 모를 장르로 쉽게들 분류하곤 한다. 순전히 주관적인 느낌에, 내가 아는 뉴에이지 음악들은 편안한 코드진행에 감정을 쥐어짜는 예쁜 선율을 얹은 곡들이 많다. '쥐어짠다'는 표현을 쓰면서도 너무나 설명하기 어려운 막연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런 곡들을 들으면 어딘지 모르게 감정을 끌어내야만 할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이 든다 (물론 내가 아는 뉴에이지 음악이랄 게 별로 없으니 섣부른 비교나 일반화는 하지 말아야겠다). 

그렇지만 <푸른 자전거>는 내가 아는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뉴에이지 음악보다 클래식에 가깝고 화성적으로 다양하다. 그러면서 굉장히 자연스럽다. 들으면서 맑아지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물론 순수함이 우러나오는 곡 제목과 설명 (앨범 재킷에는 각 곡마다 짧은 시 같은 글귀가 달려 있다)이 떠올라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연스러운 멜로디와 곡의 변화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다시 곡들을 연습하기 시작하면서 피아노 독주의 매력을 느끼고 있다. 어렸을 적 연습할 때 어렴풋한 느낌에 따라 감정을 실으려고 하던 포인트들을 지금은 의식적으로 짚어내고 표현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연주에서 디테일을 굉장히 중시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를테면 특정 음을 끊는 순간을 잘 잡는다든지, 긴 트릴의 음간격과 세기를 교묘하게 조절한다든지 하는 부분이다. 합주에 비해 독주는 음 길이나 세기의 조절이 자유롭기 때문에 그런 세세한 감정 표현을 집어넣기 좋은 것 같다. 마음에 드는 연주가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오래된 기억의 음악을 이 순간의 감정으로 표현하는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