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 사피엔스 (2)

인간이 창조한 모든 상상의 질서는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 그 어떤 질서 속에도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떤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 문화의 순수한 가치가 아니라 모순되는 딜레마를 둘여다볼 것을 주문한다. 

 “중세 문화가 기사도와 기독교를 어떻게든 조화시키는 데 실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계는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는 데 실패하고 있다. 그 모순은 모든 인간 문화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사실 이것은 문화의 엔진으로서, 우리 종의 창의성과 활력의 근원이기도 하다. … 만일 긴장과 분쟁과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가 모든 문화의 향신료라면, 어떤 문화에 속한 인간이든 누구나 상반되는 신념을 지닐 것이며 서로 상충하는 가치에 의해 찢길 것이다. … 인지 부조화는 흔히 인간 정신의 실패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핵심자산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모순되는 신념과 가치를 품을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의 문화 자체를 건설하고 유지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 저자는 ‘통합’이라는 하나의 공통적인 방향성을 발견한다. 인간 세계의 ‘메가 문화’ 의 개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적어지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오늘날 어떤 문화든 순수하게 고유한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세계의 인류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거의 동일한 형태의 정치, 경제, 과학 체계로 움직인다. 작가의 생각에, 이것은 상업과 제국과 종교의 산물이다. 

 “‘우리 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진화적 구분을 처음으로 어찌어찌 초월했고 인류의 잠재적 통일을 내다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상인, 정복자, 예언자 들이었다. 상인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단일시장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재적 고객이었다. 이들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경제질서를 세우고 싶어했다. 정복자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단일 제국이었고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신민이었다. 예언자들에게는 온 세계에 진리는 하나뿐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신자였다. 이들 역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질서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문헌 인용이 거의 등장하지 않기에 정론인지 여부는 확인이 어려운 저자의 이야기이지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흥미롭고 논쟁적인 대목은 제국에 대한 평가인데, 오늘날의 문화 대부분이 제국의 유산을 기초로 하고 있으므로 제국을 순수 악으로 규정할 수만은 없다는 내용이다. 

“세상에는 인간의 문화에서 제국주의를 제거하고 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소위 순수하고 진정한 문명만을 남기자는 취지의 학파와 정치운동이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잘해봐야 순진할 따름이고, 나쁜 경우에는 노골적인 민족주의와 편견을 가리려는 표리부동한 눈속임으로 기능한다. … 인류의 모든 문화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제국과 제국주의 문명의 유산이며, 어떤 학술적, 정치적 외과수술을 한다 해도 환자를 죽이지 않고 제국의 유산만을 도려낼 수는 없다. … 설령 우리가 더 이전에 존재했던 진정한 문화를 재건하고 지키려는 희망에서 잔인한 제국의 유산을 모조리 거부하더라도,보나마나 그때 우리가 지키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되고 덜 야만적인 제국의 유산에 불과할 것이다. … 문화적 유산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정말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길을 택하든 그 첫걸음은 이 딜레마가 복잡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과거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해서 선인과 악당으로 나누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러한 내용은 상당히 불편했는데, 그 까닭은 생각해내기 매우 어렵다. 단박에 ‘식민지 근대화론’의 든든한 논리적 근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순수했던 옛날 문명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전근대적이고 잔인한 요소를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로 인해 주요한 정치 경제적 요소들을 물려받았다고 해서, 이것이 제국을 긍정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까? 냉정한 진화론적 시각에서 제국의 의미를 찾으려는 저자의 의도 상 ‘제국이 선이냐 악이냐’ 라고 하는 가치판단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 비판자들을 순진한 민족주의자로 만드는 저자의 주장은, 좋게 보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공허한 비판이거나, 나쁘게 보면 철학의 부재로 보인다. 

종교의 진화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근대의 이데올로기를 종교의 범주로 가져오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이다. 저자는 종교를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로 정의하고 자유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저자는 ‘자연법칙 종교’라 칭한다. 종교라는 키워드로 저자의 이론을 단순명쾌하게 묶고자 무리수를 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데올로기니 종교니 하는 용어 자체는 저자의 논지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중요한 건 왜 하필 인류 사회는 지금의 모습으로 통합되어 가는 것일까 하는 저자의 물음이다 (저자는 인류 사회의 통합이 역사의 흐름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저자는 이 물음에서 ‘사후 깨달음의 오류’의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고 역사의 결정론을 거부한다. 역사는 예측할 수 없고, 문화는 유기체의 진화처럼 개별 유기체의 행복과 무관하게 퍼져 나간다(meme).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내일의 석유 가격을 1백 퍼센트 정확히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석유 가격은 예측에 즉각 반응할 것이고, 해당 예측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 정치도 2단계 카오스계다. 소련 연구가들은 1989년 혁명을 예측하지 못했고, 중동 전문가들은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비난하고 혹평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비난은 공정하지 못하다. 혁명은 그 정의상 예측이 불가능하다. …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가령 유럽인이 어떻게 아프리카인을 지배하게 되었을까를 연구하면, 인종의 계층은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세계는 달리 배열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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