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 나는 왜 쓰는가 (1)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아주 어릴 적 읽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지금은 책의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기괴하고 음산한 분위기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고전이라면 고전인 이 작품은 어린시절 가장 몰입해서 읽었던 책들 중 하나다. 이러한 <동물농장>을 쓴 작가의 에세이 모음집인 <나는 왜 쓰는가> 라는 책은 친구의 독후감 포스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곧바로 흥미가 생겨서 한번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전혀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어쩌면 그때 다 읽었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읽었다. 읽는 데 2주가 걸려서 부끄럽긴 하지만,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작가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 들게 하는 솔직하고 섬세한 묘사와 함께 위트와 통찰력이 돋보이고, 어떤 이념을 추구하되 매몰되지 않는 생각이 감명깊었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조지 오웰은 많은 에세이에서 노동자나 하층민의 삶의 질과 평등 구현과 같은 정치적 주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의 승리를 위해 전쟁에 직접 참여하거나 특정 계층의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그들의 삶을 살아본 후 글을 쓰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동시에 특정 이념, 종교, 인물의 결점을 애써 무시하거나 사상에 매몰되는 경향을 비판한다. 특히 좌파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과신하여 전체주의로 흐르는 모습을 비판하는 내용이 많다. 또한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식의 순진한 믿음이나 평화주의를 경계한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당시의 사상가들이나 작가들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감히 진단하건대, 당대의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가장 합리적인 진보주의자의 사상이 아닐까 싶다. 프롤레타리아가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을 꿈꾸되 대의에 파묻혀 자기모순에 빠지거나 무비판적인 파시스트가 되는 것을 경계하는 이런 생각은 당시 아마 우파 좌파 파시스트 모두에게 비난받기 딱 좋았을 것이다. 오늘날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은게 (특히 우리나라에서), 특정 후보나 당이 승리하면 마치 모든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현실을 보면 그렇다. 

"페탱은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게 서민들의 '쾌락 애호' 탓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프랑스의 평범한 농민이나 노동자의 삶이 페탱 자신의 것에 비해 얼마나 쾌락적인가를 잠시만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노동계급 사회주의자에게 '물질주의'가 어떠니 설교하는 이런 정치인, 성직자, 문인 같은 이들의 파렴치함이란! 노동계급이 요구하는 것들은 모두, 그런 파렴치한들 입장에선 없으면 인간적인 삶이 불가능하다 싶을 최소한의 불가결한 것들이다. ... 다만 인류의 진짜 문제에 접근하자면 그전에 궁핍과 가혹한 노동부터 철폐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 그런 면에서 노동계급의 '물질주의'는 얼마나 정당한가! 가치의 척도보다는 시간의 차원에서, 정신보다는 고픈 배가 우선인 줄을 아는 그들은 얼마나 온당한가!"

"그에 반해 웰스 씨가 제창하는 상식적이고 본질적으로 쾌락주의적인 세계관을 위해 한 파인트의 피를 기꺼이 흘릴 인간은 거의 없는 것이다. 세계 재건에 대해서, 심지어 평화에 대해서 얘기라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히틀러부터 제거해야 한다. 나치의 그것과 굳이 같을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계몽'되고 쾌락주의적인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할지도 모를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수백 년 동안 결국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고 마는 문학에서 자양분을 얻어온 우리는, 악은 언제나 결국 저절로 망한다는 본능에 가까운 신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평화주의는 대체로 이런 확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 아무튼 절로 망할 테니, 하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렇다는 것인가? 그렇게 된다는 증거라도 있는가? 근대 산업국가 중에 외세의 군사력에 정복당한 경우 말고 스스로 무너진 사례가 하나라도 있는가?"

"지적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지하의 전설처럼 떠도는 얘기가 있다. 러시아 정부가 지금은 거짓 선전이나 조직된 재판 같은 것들을 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을 몰래 기록하고 있으며 때가 되면 그것을 공포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심성은, 과거란 바뀔 수 없으며 역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당연히 값진 것이라 믿는 자유주의 역사가의 심성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는 배우기보다는 창조해야 하는 무엇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사실상 신정 국가이며, 그 지배 계급은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결코 실수가 없는 존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실수 없는 존재란 있을 수 없으므로, 이런저런 실수가 저질러진 바 없다거나 이런저런 상상의 승리가 실제로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지난 일들을 다시 짜맞출 필요가 자주 생긴다."

"하지만 반제국주의자임을 요란스럽게 자랑하던 좌파 정당들은 ... 영국의 노동자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수탈함으로써 어느 정도 이득을 봤다는 사실을 이따금 인정하긴 했으나, 수탈을 그만둬도 어떻게든 번영을 계속 누릴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계속해서 했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은 세계 전체라는 차원에서 보면 자신들도 착취자가 되는 야만스러운 진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피착취자라는 말에 넘어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 임금을 낮추고 노동시간을 늘리는 일은 생래적으로 반사회주의적인 조치라 생각되기 때문에, 경제 상황이야 어떻든 아예 논의 대상에서 제외돼야 할 문제다. 그런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딱지들이 붙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니 이런 문제는 일단 비켜가고 기존의 국민소득을 재분배함으로써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는 척하는 게 훨씬 안전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통찰력있는 견해가 많다 보니 인용이 늘어났다. 또한 그의 진짜 진가는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진단할 때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간디에 대한 소견'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간디의 사상과 행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방식을 일반화하는 것에는 적절한 의문을 표시한다. (어쩌면 사회주의자가 아니면서 민족주의자인 간디를 오웰은 심정적으로는 조금은 마뜩찮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나의 짐작일 뿐, 간디에 대한 오웰의 평가는 꽤 객관적이고 호의적이다.)

"민족주의자인 그(간디)는 엄밀히 말해 적이었으나, 어떤 위기에서도 폭력을 막기 위해(영국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효과적인 저항수단은 무엇이든 그가 알아서 막는다는 뜻이었다) 노력했기 때문에 '우리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기도 했다. ... 인도 백만장자들의 태도도 비슷했다. 간디는 그들에게 뉘우칠 것을 요구했는데, 그들 입장에선 당연히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들의 돈을 빼앗아갈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보다는 그가 나았다."

"그는 '세계를 자극' 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는 세계가 그 사람이 무얼 하는지 들어서 알 기회를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간디의 방식이 체제의 반대자들이 오밤중에 사라져 소식이 끊어져버리는 나라에선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권리가 없다면, 외부의 견해에 호소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중운동을 자극하거나 심지어 자신의 의사를 적에게 알리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 ... 그렇다면 비폭력 저항은 자국 정부 또는 점령 세력에게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라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것을 국제적으로 실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디가 최근의 전쟁에 대해 한 상호 모순적인 발언들을 보면 그가 그 점에 대해 어려움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평화주의는 외교정책에 적용할 경우, 평화주의이기를 포기하거나 유화정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편, 조지 오웰은 지식인과 작가들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한다.

"편파적이지 않은 관점이란 '불가능' 하며, '어떤' 신조나 대의든 다를 바 없는 거짓과 우매와 야만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정치는 아예 멀리해야 한다는 근거로 그런 주장이 흔히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의 세계에세는 지식인이라 할 만한 그 누구도 무관심해진다는 의미에서 정치를 멀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나는 지식인이라면 정치에(넓은 의미의 정치를 말한다) 개입할 수밖에 없으며 나름의 선호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즉, 똑같이 나쁜 수단과 더불어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대의가 다른 대의보다는 객관적으로 낫다는 인식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이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감정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는 문제이며, 그다음으로는 불가피한 편견의 여지를 두느냐의 문제다. 러시아를 증오하고 두려워한다면, 미국의 부와 세력을 부러워한다면, 유대인을 경멸한다면, 영국 지배계급에 대하여 열등감을 갖고 있다면, 그런 감정을 생각만으로는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인식할 수는 있으며, 그것 때문에 사고 과정이 오염되는 일은 방지할 수 있다. 피할 수 없으며 어쩌면 정치적 행동을 위해 필요하기까지 한 정서적 충동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병존할 수 있어야 한다. 단, 거듭 말하지만 거기엔 '도덕적' 노력이 요구되는데, 우리 시대의 주요한 문제에 대하여 최소한 죽어 있지는 않은 동시대 영국 문학만 놓고 봐도 우리들 가운데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 이는 너무나 적다는 걸 알 수 있다."

"문학은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관한 한, 단순한 저널리스트와 가장 '비정치적'이고 창의적인 작가 사이엔 별 차의가 없다. ... 그는 자기가 뜻하는 바를 더욱 명료하게 하기 위해 진실을 비틀고 풍자할 수는 있어도, 자기 마음의 풍경을 곡해할 수는 없다. ...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한다면, 결과는 그의 창의력이 고갈되는 것뿐이다. 그가 논란이 될 만한 주제를 피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치적인 문학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전체주의의 분위기는 시인에겐 숨 쉴 만한 것일지 몰라도 어떤 유형이든 산문작가에겐 치명적인 것이 된다."

"우리들 대부분은 모든 선택이, 그리고 모든 정치적인 선택 역시 선과 악의 문제이며, 필요한 일은 옳은 일이도 하다는 오래 이어져온 신념을 아직도 갖고 있다. 나는 우리가 탁아소에나 어울리는 그런 신념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에선 둘 중 어느 쪽이 덜 악한지를 판단하는 것 이상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악마나 미치광이처럼 행동해야만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이를테면 전쟁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옳거나 온전한 일이 분명코 아닌 것이다. ... 따라서 그런 일들에 관여하게 된다면 자신의 일부는 불가침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 그에 비해 예술가는, 특히 작가는 바로 그런 요구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도록 요구받는 일)를 받는다. 사실 그것은 정치인들이 그에게 유일하게 요구하는 바다. 그런 요구를 거부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전부이기도 한 그의 절반은 다른 누구 못지않게 단호하게, 필요하면 누구보다 맹렬하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글은 어떤 가치를 갖는 한, 언제나 보다 온전한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가담하지 않은 채 사태를 기록하고 사태의 필요성을 인정하되, 속아서 사태의 본질을 잘못 보게 되기를 거부하는 절반의 자신 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