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 사피엔스 (3)

그렇다면 역사는 왜 하필 지금의 모습으로 진행되었을까? 저자는 그것을 '무지의 발견에 이은 과학의 발전', 그리고 과학과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결탁으로 설명한다. 현대과학과 전통적인 지식의 차이는 무지를 인정하고, 관찰을 중시하고, 이론을 통해 기술을 개발한다는 점이다. 무지를 인정하자 새로운 발견을 통해 진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타났다. 

전직 과학도로서 과학이 정치, 경제, 종교적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된다는 작가의 주장은 슬프고 안타깝지만 현실적이다. 작가는 과학의 발견이 이러한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상위에서 벌어진다는, 또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순진할 뿐만 아니라 그랬던 적도 없고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연구를 위한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연구의 우선순위를 특정한 기준에 따라 정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과학은 자신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할 수 없다.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할 능력도 없다. 순수한 과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가령 늘어난 유전학 지식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치 않다. 그 지식을 암 치료에 이용해야 할까, 유전자 조작 슈퍼맨을 만드는 데 써야 할까, 아니면 슈퍼 사이즈 젖통이 달린 유전자 조작 젖소를 만드는 데 써야 할까? 자유주의 정부, 공산 정부, 나치 정부, 자본주의 기업은 동일한 과학적 발견을 완전히 다른 용도로 이용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떤 용도를 다른 용도보다 선호할 과학적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과학연구는 모종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했을 때만 번성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연구비를 정당화한다. 그 대신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의제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의 발견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어떻게 해서 앨러머고도와 달 - 수많은 다른 목적지가 아니라 - 에 도달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심리학자, 생물학자, 사회학자의 업적을 조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리학과 생물학과 사회학을 형성했고 다른 방향들을 무시하면서 특정 방향으로 밀어붙인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경제적 힘을 고려해야 한다."

과학과 제국은 서로 양성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과학 덕분에 제국은 힘을 키웠고 제국은 과학을 지원하고 발전시켰다. 그러나 왜 하필 유럽이었을까? 돈과 자본주의, 정확히는 '성장'과 '신용'의 힘 덕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과학혁명 덕분에 진보와 성장이 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미래에 대한 신뢰와 신용이 생겨난 것이다. 제국-자본주의-과학의 결탁은 강력한 괴물이었다.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 전쟁과 정복이 이루어졌다. 그리스의 독립은 그리스 반군 공채가 휴지조각이 될 것을 두려워한 영국 함대의 개입으로 가능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증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주식을 구매한 개인이나 그것을 판매한 중개인, 노예무역 회사의 경영자는 아프리카인에 대해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인 1천만 명의 삶보다 자기 이익에 더 신경을 썼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벌인 군사작전에 돈을 댄 것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자선사업에 돈을 대고, 좋은 음악과 미술을 즐기는 네덜란드의 정직한 시민들이었다. ... 지구의 한켠에서 현대 경제가 성장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범죄와 악행이 뒤따랐다."

오늘날 과학과 자본주의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을 가져온 동시에 동물산업의 기계화나 소비지상주의를 낳았다. 또한 "가족과 지역 공동체가 붕괴하고 국가와 시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로 인해 각 개인은 독립했으나 소외되었다. 많은 곳에서 제국과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가 자리잡았다. 과연 오늘날 인류는 더 행복해졌는가? 저자는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에서 행복이라는 요소가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행복을 측정할 것인가? 주관적인 느낌으로 측정할까, 화학적인 수치로 잴 수 있을까? 저자는 불교에 관심이 많은지, 행복을 위해 번뇌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하는 불교의 교리를 꽤나 길게 소개한다. 어쨌든 역사의 의미를 생각할 때 개인의 행복을 고려해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충분히 생각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피엔스가 마치 신처럼 생명을 설계하고 죽음을 극복하며 심지어 무생물적인 생명체마저 만드는 단계에서, 저자는 "우리가 과연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과학 프로젝트를 중단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인류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보던 어떤 한국사 시리즈 만화책은 각 챕터 말미에 당대의 민중의 삶에 대한 내용을 그렸다. 그런데 그 내용은 항상 비슷했다. 시대에 따라 사는 모습에만 차이가 있을 뿐 결론은 일반 사람들의 삶은 팍팍하고 힘들다는 것이었다. 기술의 진보가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는 것, 역사와 과학과 정치와 종교가 인간의 미래상과 인류의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어찌보면 단순한 진리를 이 책은 인류사 전체라는 방대한 스케일과 자연스러운 논증으로 풀어낸다. 통계나 진화론, 게임이론 같은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한 역사책을 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늘 있었는데, 이 책은 그러한 지적 니즈도 어느 정도 충족해 준다. 내가 지지하는 가치가 결국 인간이 만든 또 하나의 상상 속 질서일 뿐이고 그 가치의 전파가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좀 허무하지만, 그러한 현실을 직시해야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나에게 더 나은 삶,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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