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와 얼굴들 - Mono


정확히 10년 전 EBS 스페이스공감에서, 장기하라는 인물이 웬 선글라스를 낀 여자 둘과 함께 위아래로 풍차마냥 팔을 흔들어대던 영상을 기억한다. 처음 봤을 때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싶었다. 이 난데없고 전위적인 댄스의 '달이 차오른다 가자'와, 썩어가는 자취생의 생활상을 랩(?)으로 읊조린 '싸구려 커피' 이 두 곡으로 장기하와 얼굴들은 단숨에 인디계의 왕이 됐다.

사실 그 뒤로 장얼은 내 관심에서는 약간 멀어져 있었다. 3,4집은 그닥 인상깊지 않아서 풀로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트위터에서 이들의 해체 예고를 접했을 때, 혁명적이었던 이들의 데뷔앨범 <별일 없이 산다>를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 마지막 음반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해체라는 화두와 별개로 음악 자체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필 처음 들은 곡이 '초심'이었는데 사실 이 곡은 좀 별로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장얼의 살짝 구수한 말투와 오래된 느낌의 사운드는 왠지 거부감이 드는 면이 있다. 그런데 어느새 슬금슬금, 특히 몇몇 곡들은 계속해서 다시 듣고 마는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장기하와 얼굴들 - 그건 니 생각이고 (M/V)

특유의 보컬과 랩(?)을 필두로 하는 장얼의 아이덴티티는 워낙 확실하다. 그렇지만 이 앨범은 확실히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 앨범들, 특히 첫 앨범과는 다르다. 먼저 기타 중심의 편곡보다는 여러 악기의 역할과 밸런스가 돋보인다. 기타도 여러 이펙트나 톤을 사용했다. 그래서 통기타 반주 위에 생톤에 가까운 일렉기타의 리프가 얹힌 느낌이 대부분이었던 1집과 비교하면 사운드 면에서 다채롭고 원숙한 느낌이 확실히 든다. 가장 훌륭한 밸런스를 담았다고 자부한 게 과장은 아닌 것 같다.


장기하와 얼굴들 - 거절할 거야 (M/V)

이런 세련미가 가장 돋보이는 곡이 2번 트랙 '거절할 거야'다. 인트로가 임팩트있다. 가사가 사실 좋긴 한데, 반주가 세련되다 보니 왠지 이런 내용의 가사로 사용하기엔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렇지만 유병재가 참여한 초유의 심리검사 뮤비가 아쉬움을 달래주고도 남는다. 곡 제목을 알기 전까진 후렴의 '거절할거야'가 '꺼져 할거야' 라고 들리곤 했는데, 이렇게 들어도 충분히 말이 된다는 게 재밌다.

10년의 세월과 (특히 프런트맨 장기하의) 연예계 활동은 음악의 메시지도 확실하게 바꾸어 놓은 듯하다. '아무 것도 없잖어', '멱살 한 번만 잡히십시다', '싸구려 커피' 같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루저와 백수의 이미지는 이제 없다. 정말 다양한 사람을 접하고 일을 해보고 사랑도 나눴을 이들의 마지막 화두는 '혼자'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내 갈 길을 가고 ('그건 니 생각이고') 나와 채팅을 나누며 ('나와의 채팅')  누가 와준다면 반갑겠지만 결국 또 나는 혼자 걸어갈 것이다 ('나 혼자'). 예전에 비해 상상력보다는 경험으로 이야기하는 가사지만 그만큼 호소력도 있다. 독백이기도 하고 듣는 이들에게 주는 메시지이기도 한 가사의 깊이가 남다르다.

5번트랙 '등산은 왜 할까' 이후로는 '나 혼자'를 제외하곤 곡 자체는 그닥 매력적이지 않은 것 같다. '등산은 왜 할까' 벌스의 그 드럼..80년대의 "That Thing You Do" 이후로 너무 많이 들었다. 멜로디나 코드도 평범하다. '초심'은 멜로디 코드 리프 가사 모두 특별하단 느낌은 들지 않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별거 아니라고'는 진솔한 가사 만큼이나 전형적인 발라드다.


장기하와 얼굴들 - 나란히 나란히 (M/V)

가사 얘기를 더 해야겠다. 메시지 만큼이나 소리 자체나 라임에 매우 신경을 쓴 흔적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소절의 처음이나 마지막에서 특정 단어나 음절을 반복하는 기본적인 장치는 매우 자주 보인다. 아예 어떤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하기도 한다('그건 니 생각이고' - 이 길이 내 길인지 니 길인지 길이기는 길인지 지름길인지 돌아 돌아 돌아 돌아 돌아가는 길인지는, '거절할 거야' -  그래 그래 그래 그래 그랬나봐 지쳐버렸나봐, '나 혼자' - 가만히 가만히 가만히 가만히 가만히....).

그런데 몇몇 곡에선 더 나아가기도 한다. '그건 니 생각이고' 의 "그대의 머리 위를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너처럼 아무것도 몰라"의 라임은 힙합의 랩 같은 느낌이다. 말이 나온김에 이 곡 찬양을 더 하자. 말과 음이 일치하는 한국말의 향연, 개인적인 경험과 꼰대를 거부하는 시대적인 화두를 절묘하게 섞는 현명함,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서태지와아이들 샘플링, 가사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초저예산 뮤비... 옛날 아케이드게임이 떠오르는 신디 소리 때문에 플레이어에게 조종당하는 마리오같은 캐릭터가 생각나는데,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가사와는 아이러니같은 대비를 이룬다. 어쨌든 이제 이 곡은 밈이 되어 유투브 장기하 영상의 댓글엔 모조리 '그건 니 생각이고' 라며 대댓글이 달리고 있다. 급기야 장삐쭈의 급식생 패러디(사실 광고)까지 등장하기도..


장기하와 얼굴들 - 나 혼자

'나 혼자'의 가사는 이 앨범의 백미다. 후렴 가사를 보면


모두 아무런 소용 없지만 
나 혼 별다른 수가 없잖아 
그나 다행인 거는 있잖아 
나 혼만 이런 건 아닐 거야

'ㅏ'가 들어가는 모음 라임도 그렇지만, '없잖아'와 대비되는 의미와 누군가에게 말할 때 이야기를 시작하는 의미를 모두 갖는 '있잖아'라는 표현이 너무 좋다.


아무런 말 없는 전화기 
물끄러미 바라만 보면서 마냥 다리거나

이 곡 전체적으로 라임의 향연이지만, 특히 이 가사에서 '기'라는 글자로 라임이 이어지는 것도 정말 좋다. 거의 기형도의 시에서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같은 느낌 든다.

연말이 마지막이 될 장얼의 공연이 이어지고 있는데, 밴드의 공연으로는 특이하게 스피커 없이 관객들에게 지급되는 블루투스 헤드폰으로 소리를 전달한다고 한다. 공연장 주변이 주택가라는 점을 고려한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하겠지만, 복고적인 사운드와 별개로 시대성과 첨단에  마지막까지도 다가가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 이들이 해체하는 게 내 삶에 어떤 의미일진 모르겠지만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면서 적잖이 묘한 기분이 든다. 어쨌든 한 시대의 종말인 느낌이다. 아니 그건 내 생각일지도, 알고 보면 다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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