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 사피엔스 (1)

 제목이 ‘사피엔스’인 역사책 답게 이 책은 역사적 사건들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인류사의 변곡점이 된 중요한 흐름을 다양한 학문 분야의 고찰을 바탕으로 풀어낸다. 유럽과 비유럽의 격차가 벌어지게 된 요인을 탐구한 ‘총, 균, 쇠’나 우월한 정치 경제체제를 분석한 ‘국가란 무엇인가’ 등의 책에 비해 더 근원적인 문제를 더 큰 time-scale에서 조망한다. 그래서 통찰력이 있고, 많은 좋은 책들이 그렇듯 counter-intuitive한 견해를 매끄럽게 제시한다. 이러한 견해들은 나중에 곱씹으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설득력 있지만 누군가가 정확한 논거와 근거를 바탕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특유의 위트도 글 읽는 재미를 더한다. 

“…정말로 부자연스러운 행동,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은 아예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금지할 필요가 없다. 수고롭게시리 남자에게 광합성을 금지하거나, 여자에게 빛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게 하거나, 음전하를 띤 전자가 서로에게 끌리지 못하도록 금지한 문화는 하나도 없었다.” 

단, 꼼꼼한 literature review에 따른 정확한 학설이라기보단 대중서로 받아들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논문 수준의 citation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용이 하나도 없는 chapter가 존재할 정도로 이 책은 핵심 주장의 많은 부분을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자체로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서 읽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주장들이 충분히 학계의 논의를 거친 타당한 의견인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은 인류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의 세 개의 혁명을 이야기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상상이라는 인지혁명 덕분에 인류는 엄청나게 다양하고 복잡한 게임을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는 전 세계를 향한 인류의 진출과 대규모 멸종이었다. 저자는 인지혁명을 포함한 세 번의 혁명이 각각 이러한 대규모 절멸을 불러왔고, 그 결말은 인간과 가축을 제외한 모든 대형동물의 멸종일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았다는 급진적 환경보호운동가의 말은 믿지 마라. 산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생물들을 아울러 가장 많은 동물과 식물을 멸종으로 몰아넣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 만일 좀 더 많은 사람이 멸종의 제1의 물결과 제2의 물결에 대해 안다면, 스스로가 책임이 있는 제3의 물결에 대해서 덜 초연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 

물론 제3의 물결에 덜 초연한 태도를 보일 것인지의 가치 판단은 인간의 몫일 테다. 나는 환경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낭만주의적인 입장이었지만, 최근에는 다양성 보존을 위해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조금 더 인본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인류사의 중요한 두 번째 흐름인 농업혁명에 관한 내용은 조금 더 counter-intuitive 하고 controvercial하다. 첫째, 농업혁명은 진화론적으로 봤을 때 식물들이 인간을 길들인 것이지 반대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농업혁명의 결과로 밀은 지구상에서 가장 생존과 번식에 성공한 식물이 되었다. 이는 밀이 ‘호모 사피엔스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작함으로써’ 가능했다. 이러한 주장은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단, 동식물을 길들이고 재배하기 시작한 인간의 발명과 지식을 어떤 ‘진보’로 이해하기보다는 좀더 철저히 진화론적인 관점과 개인의 삶의 질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진화론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종 선택설(Species Selection)이 맞는 이론인지는 모르겠으나, 농업혁명은 밀이라는 종의 입장에서도 대단히 진화론적으로 성공적이었던 사건이라는 시각은 신선하다. 
둘째, 저자에 따르면,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농업을 체택한 집단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차츰 수렵사회를 밀어내게 되었지만, 이것이 농업사회가 개개인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오히려 농업으로 인한 잉여식량은 인구증가로 상쇄되고 영양은 결핍되었으며 전염병이 더 심하게 돌아서,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수렵사회보다 못한 사회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저자가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는 수렵사회도 농경사회 못지 않게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다양한 요인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기술의 승리가 인간 삶의 진보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점은 되짚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해묵은 주장이나, 기술이 삶의 질 향상으로 연결되지 않는 현상이 비단 현대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를 통틀어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면 씁쓸하다. 
이러한 농업혁명의 승리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질서와 문자체계 덕분에 가능했는데, 바로 이것들이 농업사회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기술이 개인의 행복으로 연결되지 못하도록 막은 요인일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내용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저자가 오늘날의 주요한 가치들, 특히 민주주의, 자본주의, 인본주의, 낭만주의와 같은 사상들에 전혀 당위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사에 대한 저자의 분석에서 미국 독립선언문은 함무라비 법전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신화’를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철저한 객관화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신화는 상상 속에서 뛰쳐나와 현대 건축에서 돌과 회반죽으로 구현된다. 현대의 이상적인 집은 여러 개의 작은 방들로 나뉘어 있다. 어린이들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사적인 공간을 가져 최대한의 자율권을 지니도록 한다. 이런 사적인 방에는 거의 대부분 문이 달려 있다. 또한 어린이가 문을 닫고 잠그는 것을 관행으로 받아들이는 집이 많다. … 이런 공간에서 자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하나의 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밖에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퍼져 나온다고 말이다.” 
“사람들이 가장 개인적 욕망이라고 여기는 것들조차 상상의 질서에 의해 프로그램된 것이다. 예컨대 해외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다는 흔한 욕망을 보자. 이런 욕망은 전혀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다. 침팬지 알파 수컷은 권력을 이용해 이웃 침팬지 무리의 영토로 휴가를 갈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엘리트들은 피라미드를 짓고 자신의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데 재산을 썼지만, 누구도 바빌론에 쇼핑하러 간다거나 페니키아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휴가에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낭만주의적 소비지상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역사에 정의는 없다’라는 장에서 모든 사회는 상상의 질서에 기반한 위계와 차별을 만들었는데, 각 사회에서 나타난 위계질서는 그저 우연의 산물이 영속화된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우연한 역사적 사건으로 지배층과 피지배 집단이 발생하고, 차별이 고착화되고, 차별받은 집단에는 문화적 낙인이 찍힌다. 저자는 고대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현대 미국의 인종차별을 예시로 정확히 같은 악순환의 패턴을 드러낸다. 인간은 상상의 질서를 동원해 대규모의 협력망을 만들어냈지만, 서열과 차별과 불공평도 만들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인간 집단이 다른 인간 집단을 가축화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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